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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본문

    1.PNG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중국의 서북부인 감숙성, 섬서성 일대에서 일어남





    2.PNG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한중과 관중 사이의 길들


    진창고도는 말 그대로 "옛길"로 포야도, 당락도, 자오도 같은 잔도가 만들어지기 전에 주로 사용되던 길이다.


    유방이 삼진을 정벌할 때 이 길을 통해 진창으로 나왔으며, 조조가 장로를 정벌할 때도 이 길을 이용했다. 제갈량의 2차 북벌 때도 촉한군이 이 길을 이용해 진창을 공격했다.


    밑에 있는 남정은 한중군의 치소이다.


    그 옆에 있는 포야도는 전국시대 진나라가 만든 이후로 주요 도로였다. 하후연이 죽은 후 조조가 한중에 들어올 때 쓴 길이 이 포야도이다. 230년, 조진이 촉한을 정벌할 때도 자오도, 기산도 등과 함께 이 길을 사용했다. 제갈량의 5차 북벌 때 촉한군이 포야도를 나와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에 주둔했다. 참고로 포야도라는 이름은 한중 쪽 골짜기의 이름이 포곡, 관중 쪽 골짜기 이름이 야곡이라 붙은 이름이다.


    오장원에서 강을 건넌 북쪽에는 제갈량이 점거하려 했으나 곽회가 미리 선점한 북원이 있다. 그리고 북원의 동쪽에는 조위의 주요 거점인 미현이 있다.


    한중에서 포야도를 따라 가다가 기곡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데, 1차 북벌 때 조운, 등지가 의병을 이끌고 기곡으로 나와 조진과 대치했다.


    포야도 다음은 당락도이다. 포야도와 마찬가지로 남쪽이 당곡, 북쪽이 낙곡이라 붙은 이름이다. 조진의 아들 조상이 촉한을 정벌할 때 직접 이 길로 들어왔지만 한중으로 나오는 입구인 흥세산에서 왕평군에 막혀 돌아갔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촉한군의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었다.


    257년, 수춘에서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강유가 당락도를 나와 그 입구에 있는 장성(성 이름)을 공격했으나, 당시 관중을 진수하던 사마망(사마의 동생인 사마부의 아들로 사마의 형 사마랑의 후사를 이음)과 등애는 굳게 지킬 뿐 맞서 싸우지 않았고 강유는 결국 돌아가게 된다. 


    종회가 촉한을 정벌할 때 포야도, 자오도와 함께 이용되었다.


    마지막은 자오도로, 역시 남쪽이 자곡, 북쪽이 오곡이라 붙은 이름이다. 장안에서 한중으로 오는 가장 빠른 길로, 유방이 한중으로 들어올 때 이 길을 사용했다. 위연이 이 길을 통해 곧바로 장안을 공격하자는 의견을 내기도 했고, 2차 북벌 때 장합이 이 길을 통해 한중을 위협하여 제갈량이 회군하게 했다. 조진이 촉한을 정벌할 때 이 길을 이용했고, 조상 때는 하후패가 이 길을 이용해 공격해왔고, 종회 때도 일부 군이 이 길을 통해 들어왔다.


    남쪽 길과 북쪽 길 2개가 있는데 북쪽길은 일명 황금곡이라 한다. 삼국시대까지는 주로 남쪽길이 이용되었으나 서진 시대부터 북쪽 길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삼국시대는 아니지만 동진의 환온이 형주에서 강을 따라 무관으로 들어오며 사마훈에게 자오곡을 통해 관중을 공격하게 했다. 하지만 당시 관중을 차지하고 있던 전진군이 청야전술을 펼치면서 군량 부족으로 회군하게 된다.






    3.PNG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북벌의 주무대는 위에서 본 관중보다는 서쪽에 있는 일명 농서/농우 지방이다. 가정 동쪽에 있는 산의 이름이 농隴산이라 붙은 이름이다. 농산 왼쪽에 있는데 왜 농우냐 물을 수 있는데, 고대 중국에서는 남쪽을 바라보는 것을 기준으로 했기 때문에 동쪽=좌, 서쪽=우라 불렀다. 동쪽이 청룡, 서쪽이 백호인데 좌청룡 우백호라 하는 것도 같은 맥락. 비슷한 사례로 황하 서쪽인 량주(지도에서 란저우 서쪽) 지방을 하우河右라 부른 것이 있다.


    제갈량의 1차 북벌 때 촉한군이 기산으로 진출했고, 옹주자사 곽회는 천수군의 치소 기현이 아닌 상규현을 지켰다. 이 때 천수군(상규 일대), 남안군(상규 서쪽), 안정군(진창 북쪽) 3개 군이 호응했지만, 마속이 가정에서 패하면서 모두 포기하고 후퇴한다.



    4.PNG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상규와 기산 일대



    5.PNG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더 서쪽으로 오면 이쪽은 제갈량은 온 적이 없는 곳이다.


    247년 강유가 국산에 성을 쌓았으나 곽회, 진태, 등애 트리오에게 막혔고, 또 253년에 석영-동정을 통해 남안군(지도의 환도가 남안군의 치소)을 공격했으나, 점령하지 못했고, 위나라의 진태가 구원하러 낙문에 도착하자 후퇴했다.



    6.PNG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더 서쪽으로 가면 농서군 땅이 나온다. 


    254년 적도현의 현장이 항복하자, 강유가 군을 이끌고 적도현을 점거했으며 이내 양무(환도 서쪽)를 포위하고 위나라 토촉호군 서질과 싸워 촉한의 장수인 장억이 전사하였으나 서질을 죽이는 성과를 거뒀다. 양무현을 점령하는데는 실패했으나 여러 현들이 귀부했고, 강유는 하관, 임조, 적도 3개 현의 백성을 성도 인근으로 이주시킨다.


    255년 강유가 고관 인근에서 위나라의 옹주자사 왕경을 격파하자 왕경은 적도성으로 들어가 지켰다. 등애 등 장수들은 왕경을 포기하자 했으나 진태가 기지를 발휘해 왕경을 구원했고, 강유는 종제로 돌아가 주둔했다. 종제는 적도 인근이라는 설이 있고 무도군 하변 인근이라는 설이 있다.


    참고로 고관, 적도를 따라 흐르는 강이 조수洮水로 이 강의 서쪽에서 강유가 왕경을 대파했다.


    8.PNG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256년 강유가 다시 기산을 공격하려 했는데, 등애가 이미 기산을 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동정을 거쳐 남안군으로 향했다. 등애는 다시 무성산을 미리 점거한 채 강유와 대치했고, 강유는 호제와 상규에서 만나기로 하고 급히 상규로 달려갔는데 호제는 도착하지 않았고, 단곡에서 등애한테 비오는 날 먼지나도록 쳐맞는다.




    7.PNG 지도로 보는 촉한의 북벌

    262년, 강유가 다시 후화를 공격했으나 또 등애한테 쳐맞고 답중에서 둔전을 시작한다. 촉한의 주력군이 구석인 답중에 머물던 틈을 놓치지 않고 위나라의 사마소가 등애와 종회를 시켜 촉한을 정벌하게 한다. 참고로 답중에서 한중까지 거리가 장안에서 한중까지 거리보다 멀다... 강유군은 제갈서에게 후방이 끊길 뻔했지만 강유의 신들린 기동으로 간신히 빠져나와 검각을 지켰고, 주력군이 지키는 검각을 뚫기 힘들 것이라 판단한 등애는 아직 군사적으로 이용된 적이 없는 음평의 길로 우회해 파촉 분지로 들어간다.




    어쨌든 촉한은 여러번 위나라를 공격했으나 결국 목표였던 농우, 관중을 얻는데는 실패했다. 개인적으로 강유가 진창이나 장안 인근에서 서질, 왕경을 격파한 것 같은 대승을 거뒀으면 어땠을지 궁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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