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월드컵
한국(조선)은 19세기 후반까지 축구라는 스포츠를 접하지 못했다. 한국의 축구는 1882년 HMS 플라잉 피시 호의 영국 해군 수병들이 인천항에 기항하는 동안 경기를 치른 것이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한국은 1905년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1910년에 완전히 합병되었다.
1921년에는 제1회 전조선축구대회가 개최되었고, 1928년에는 조선축구협회가 조직되어 조선에 축구를 보급하고 발전시키는 토대가 마련되었다. 조선 팀은 1926년경부터 일본 팀과의 대회에 참가하였고 조선 축구단은 사실상 한국인들을 위한 팀이 되었으며 1935년 황제 컵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하였다. 한국인들은 또한 일본 대표팀을 위해서 뛰기도 하였는데, 특히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일본을 위해 뛰었던 김용식이 대표적이다.
한국은 1950년대부터 아시아의 강국이었다. 그들은 1956년과 1960년에 두 번의 아시안 컵에서 우승했다. 그들은 1954년 스위스로 향하였고 월드컵에 참가한 두 번째 아시아 국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1986년이 되기까지 또 다른 월드컵에 진출하진 못했다. 아시아 최고의 선수 차범근이 이끄는 한국은 1986년에 불가리아와 비기는 데 그쳤다. 하지만 그들은 8회 연속 월드컵에 진출했다. 2002년에 그들은 폴란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이기고 홈에서 열린 월드컵 때 준결승에 진출하기도 했다. 이것은 1930년 미국 이후 남미와 유럽 외 국가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것이었다.
월드컵 1986
이운재는 4차례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에게 있어 최고의 대회는 2002년 한국이 준결승에 진출한 대회였으며,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에서 페널티킥을 막아내며 감동을 안겼다. 그는 4번의 월드컵에 출전한 아시아 출신 선수 7명 중 한 명이다. 그는 주로 수원 삼성 블루윙즈, 김천 상무FC, 전남 드래곤즈에서 활약했다.
이세연은 20세기 최고의 한국 골키퍼들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2002년 MBC와 갤럽 코리아가 1,500명의 한국인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한국 축구 역대 베스트 11의 골키퍼로 선정되기도 한 그였다. 구단 커리어에서 그는 양지와 서울신탁은행 축구단에서 뛰었다. 1966년부터 1973년까지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81경기를 뛰었다.
홍덕영
홍덕영은 1948년 하계올림픽, 1954 FIFA 월드컵, 1954년 아시안게임에 출전한 대한민국 대표팀의 골키퍼였다. 올림픽에서 한국은 멕시코를 이기기도 했다. 은퇴 후, 그는 1957년부터 1967년까지 국제 축구 심판을 역임했다. 그는 1948년부터 1954년까지 한국 국가대표팀에서 17경기를 출전했다. 감독직으로는 고려대학교에서 출발을 하였다. 2005년 대한민국 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김호는 1969년 한국 올해의 선수였다. 그는 1965년부터 1973년까지 한국을 대표했다. 그는 1970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 그는 또한 1972년 아시안 컵에서 뛰었다. 그는 김정남과의 파트너십으로 유명했다. 그는 제일모직 축구단의 아마추어 선수였고 한국 상업은행 축구단의 창립 멤버였다. 그는 감독으로서 1994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컵 때 한국 국가대표를 이끌기도 했다.
홍명보
홍명보는 한국의 역대 최다 출전 기록 보유자이다. 그는 월드컵에 4번이나 출전했다. 2002년에는 대한민국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월드컵 준결승에 진출해 브론즈볼을 획득하기도 했다. 그는 아시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비수일 것이다. 구단 소속으로는 주로 K리그 포항 스틸러스, 일본 벨마레 히라츠카, 가시와 레이솔, 미국 메이저리그 사커 LA 갤럭시에서 활약했다.
김정남은 1962년부터 1971년까지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뛰었다. 그는 1971년 올해의 한국 선수로 선정되었다. 그는 1964년 하계 올림픽에서도 대한민국을 대표하여 뛰기도 했다. 그는 한국이 1970년 아시안 게임에서 우승하도록 도왔다. 그는 국가대표팀에서 김호와의 수비 파트너십으로 유명했다. 구단 소속으로는 양지 축구단과 한국외환은행 축구단에서 뛰었다. 그의 두 형제 김성남과 김강남도 한국을 대표했다.
김민재는 유럽으로 향하기 전에 경주 한국수력원자력, 전북 현대 모터스, 베이징 궈안에서 시작했다. 그는 나폴리에서 이름을 알리기 전에 페네르바흐체에서 뛰었다. 그는 2023년 세리에 A 올해의 수비수로 지명되었다. 2023년에 그는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했다. 그는 60경기 이상의 국가대표팀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다. 그는 2022 월드컵에도 출전하였다.
정용환은 1984년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의 대우 로얄즈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86년 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였고 그 후 아프로-아시안 클럽 챔피언십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국가대항전에서는 1986 월드컵, 1990 월드컵, 1984 아시안컵, 1988 아시안컵에서 한국을 대표했다. 그는 1983년부터 1993년까지 총 85경기에 출전했다.
김태영은 1998년과 2002 월드컵 본선에 한국 대표로 출전했다. 2002년 한국과 일본이 공동 주최한 2002 월드컵 본선에서 그는 4위를 차지한 팀의 멤버였다. 그는 1992년부터 2004년까지 105경기에 출전했다. 구단 커리어에서는 1995년부터 2005년까지 전남 드래곤즈에서 선수 커리어를 모두 보냈다.
이영표
구단 소속으로 이영표는 유럽에서 뛴 아시아인들 속에서 가장 성공적인 커리어 중 하나를 누렸다. 그는 PSV 에인트호번과 토트넘 핫스퍼에서 선발 선수였다. 이영표는 2000년 한국 K 리그 1의 안양 LG 치타스로 알려진 FC 서울에서 프로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는 또한 사우디아라비아와 MLS에서도 시간을 보냈다. 그는 1999년부터 2011년까지 한국을 위해 127경기를 뛰었다. 그는 월드컵에 세 번이나 나갔다.
유상철은 1994년부터 2005년까지 124경기에 출장했다. 그는 1998년과 2002년 월드컵에 진출했다. 그는 2002 월드컵 대표팀에 발탁되었다. 그는 1994년부터 1998년까지 한국의 울산 현대에서 뛰었다. 1998년 월드컵을 앞두고 일본의 요코하마 F. 마리노스로 이적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가시와 레이솔에서도 잠시 뛰었다. 이후 그는 울산 현대와 요코하마 F. 마리노스에서 두 번째 선수 커리어를 보냈다.
한국 축구의 "대부"로 알려진 김용식 감독은 1936년 하계 올림픽에서 일본 대표팀에 선발된 유일한 한국인이 되었고, 대회에서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스웨덴을 물리치는 데 기여했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그는 1948년 하계 올림픽에서 한국을 대표하여 선수 겸 감독으로 참여하였다.
김주성
김주성은 1988년부터 1990년까지 3년 연속 아시아 올해의 선수상을 수상했다. 그는 선수 커리어 동안 긴 머리로 유명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아시아 축구의 아이콘이기도 했다. 그는 1986년, 1990년, 1994년에 세 번의 월드컵에 출전했다. 구단 선수 커리어 동안, 그는 자국의 조선대학교와 부산 대우 로얄즈에서 뛰었다. 나중에 그는 독일의 Vfl 보훔에서도 두 시즌을 보냈었다. 그는 한국을 대표하여 76경기나 출장했다.
조광래는 역대 최고의 한국 중앙 미드필더들 중 한 명으로 여겨졌다. 그는 "컴퓨터 링커"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조광래는 연세대학교, 포항제철, 상무 축구단, 대우 로얄즈에서 구단 커리어를 보냈다. 그는 1976년 세계대학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우승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1977년부터 1986년까지 그는 한국을 위해 100경기를 뛰었다. 그는 멕시코에서 열린 1986 월드컵에도 출전했다.
허정무
허정무는 유럽에서 뛰는 최초의 한국 선수들 중 한 명이었다. 그는 1980년 PSV 에인트호번에 입단하여 1983년까지 머물렀다. 국내에서 그는 1984년부터 1986년까지 울산 현대에서 뛰었다. 그는 1974년부터 1986년까지 101경기나 국가대표로 출전했다. 그는 멕시코에서 열린 1986 월드컵에 출전했다. 그는 해당 대회 1라운드에서 디에고 마라도나와 각축전을 벌이는 사진으로 영원히 기억되었다. 그는 1978년과 1986년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두 개를 따냈다.
기성용은 FC 서울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셀틱, 스완지, 뉴캐슬 유나이티드, 마요르카에서 뛰었다. 2008년부터 2019년까지 기성용은 100경기 이상 출전하며 대한민국 국가대표로 활약했다. 그는 세 번의 월드컵 선수단에 선발되어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주장을 맡았고, 세 번의 아시안컵에 참가해 2015년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는 또한 두 차례 올림픽에 출전해 2012년 동메달을 획득하기도 했다.
박지성
박지성은 역사상 가장 많은 트로피를 들어 올린 아시아 축구선수로, 챔피언스리그 트로피를 차지한 최초의 아시아 축구선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 출전한 최초의 아시아 축구선수, 클럽 월드컵에서 우승한 최초의 아시아 축구선수이다. 그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7시즌을 보냈다. 그는 또한 교토 퍼플 상가, PSV, QPR에서도 뛰었다. 국가대표팀에서 그는 100경기를 출전했고 3번의 월드컵에 진출했다: 2002, 2006, 2010. 그는 월드컵에서 AFC 역대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최정민은 평양에서 자랐으나 한국전쟁 중에 남쪽으로 이주했다. 그는 특무부대 축구단에 입단했다. 그는 KACIC 축구 구단에서 뛴 것이다. 국가대표로서 최정민은 47경기에 출전해 22골을 넣었다. 그는 소속팀에서 두 번의 AFC 아시안컵 우승과 두 번의 아시안게임 은메달을 획득했다. 그는 1954년 그 유명한 월드컵 예선의 영웅이었다. 그는 한국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하도록 3골을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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