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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 갈레르나] 레알 마드리드와 브라질리언의 유구한 역사: 펠레, 가린샤, 히벨리누, 지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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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심
    2024-05-31 20:35 54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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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029954.jpg [라 갈레르나] 레알 마드리드와 브라질리언의 유구한 역사: 펠레, 가린샤, 히벨리누, 지쿠...

    1950년대 브라질 축구의 폭발적인 성장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로부터 관심을 이끌었고, 그는 그때부터 그 나라의 시장을 주시하며 최고의 인재를 색출하고 그들을 레알 마드리드에 데려오려고 노력했다. 이 로스 블랑코스 지도자의 제안과 여러 시도에도 불구하고 일부 거래만이 완료되었고 다른 많은 작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디디 외에도 펠레, 가린샤, 히벨리누, 지쿠와 같은 이름들이 메렝게스 구단과 여러 차례 연결됐다.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브라질 대표팀은 끔찍한 "마라카낭" 이후 8년 만에 첫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대표팀에는 17세의 어린 펠레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지만, "가린샤"로 알려진 마누엘 프란시스쿠 두스 산투스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불군형한 선수였다. 수비수들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독특한 드리블을 구사하는 오른쪽 윙어였던 그는 퀄리티, 민첩성, 기술을 갖추었다. 대회가 끝나자마자 베르나베우가 이 공격수에게 관심이 있다는 소문이 브라질 언론에 처음 보도되었다.


    1000029955.jpg [라 갈레르나] 레알 마드리드와 브라질리언의 유구한 역사: 펠레, 가린샤, 히벨리누, 지쿠...

    1958년 8월, “레알 마드리드가 가린샤에 대한 관심이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O Jornal>에 실렸다. 이 기사는 또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사업가 호세 다 가마에게 가린샤 영입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도록 승인했다고 보도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이적료로 4천만 크루제이로를 제시했다. 그해 여름 그들의 꿈은 가린샤, 레이몽 코파, 퐁텐(협상이 진행 중이었던),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와 함께 공격진을 구성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가린샤나 퐁텐 모두 끝내 로스 블랑코스와 계약하지 못했다. 1년 후, 이 위대한 브라질리언 윙어는 다시 한번 메렝게스와 연결됐었지만 이적료로 600만 페세타 이상을 요구한 보타포구의 엄청난 요구로 인해 계약은 결렬되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포기하지 않았고 1962 칠레 월드컵이 끝난 후 마지막 시도를 했다. 그러나 보타포구는 이들의 관심과 더불어 유벤투스의 관심에 반하여, 우대한 경제 조건으로 가린샤와 재계약했다. 게다가 El Diario de Burgos에 따르면, 前 마드리드 선수였던 디디는 가린샤에게 "레알과 계약하지 말라"라고 조언했다고 한다.


    1959년 여름, 레이몽 코파는 스타드 드 랭스로 돌아가기 위해 마드리드를 떠났다. 베르나베우는 오른쪽 윙어에 공백이 생겼고, 브라질리언으로 대체하기를 원했다. 그가 가장 먼저 관심을 보인 선수는 1957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비올라 유니폼을 입고 피오렌티나에서 뛰었던 파우메이라스 소속의 오른쪽 윙어인 줄리뉴였다. 하지만, 선수의 아버지가 최근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단둘이 조국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다. 그래서 줄리뉴, 디디, 디 스테파노, 푸스카스, 헨토를 공격진에 배치하려던 "주젭 사미티에르(보드진)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라고 El Diario de Burgos는 설명했다. 그로 인해 베르나베우는 다른 브라질리언을 계속 찾았다. 가린샤에 다시 실패한 후 "카나리우"로 알려진 다르시 시우베이라를 찾았다. 브라질의 Diario de Noticias에 따르면, 이 빠르고 효율적인 윙어는 대표팀에서 7경기를 뛰었으며 750만 크루제이로의 이적료에 레알과 계약했다고 한다.


    그해 여름 이적 시장에는 디디를 영입하는 폭탄 계약도 이루어졌다. 베르나베우는 1958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디디를 눈여겨보고 있었으며, 디디는 중원에서 다른 선수들과는 차이 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당시 아르헨티나의 엑토르 리알은 기량이 쇠퇴하기 시작했고 베르나베우의 기술진은 그를 대체할 선수로 디디를 영입하는 것을 고려했다. 디디는 완벽한 선수였고, 보타포구에게 8만 달러를 지불하고 디디에게 월 15,000페세타, 연간 100만 크루제이로의 보너스를 받는 2년 계약이 체결된 후 계약이 성사되었다.


    브라질 언론에 따르면 베르나베우는 카나리우와 디디의 영입뿐만 아니라 6월엔 곤살루와 올란두의 영입도 시도했다고 한다. 곤살루는 포르투게사 산티스타 소속의 창의적인 미드필더로, 7월 7일 O jornal에 게재된 보도에는 3백만 크루제이로가 제시되었다고 한다. 올란두는 브라질 국가대표팀에서 센터백으로 뛰면서 간결함과 냉정함, 겸손한 자신감을 가장 큰 미덕으로 삼으며 스웨덴 월드컵에서 우승했었다. diario carioca 신문의 보도에는 이적료로 1,000만 크루제이로, 선수의 연봉으로 200만 크루제이로라는 금액이 밝혀졌다. 끝내 거래는 성사되지 않았고 올란두는 1961년 보카 주니어스로 떠날 때까지 바스쿠 다 가마와 함께했다.


    1000029957.jpg [라 갈레르나] 레알 마드리드와 브라질리언의 유구한 역사: 펠레, 가린샤, 히벨리누, 지쿠...

    메렝게스 회장 베르나베우는 축구선수 외에도 감독 시장도 주시했다. 아르헨티나 국적의 카르니글리아 감독은 해고되었고 브라질에서 그의 후임자를 물색했다. 첫 번째 선택은 브라질과 함께 세계 챔피언에 오른 비센치 페올라였다. 4월, O Jornal은 레알 마드리드가 페올라 감독에게 200만 크루제이로와 월 10만 크루제이로의 계약 및 기타 혜택을 제시하며 관심을 보였다는 소식을 보도했다. 이에 대해 페올라 감독은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제안을 받지 못했다. 제안이 도착하면 검토해 보겠다. 누가 그런 제안을 싫어할까요?,"라고 컨펌하며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공은 플라멩구 감독을 맡고 있던 파라과이 출신의 마누엘 플레이타스 솔리치 감독에게로 향했다. 며칠간, 협상을 하고 마드리드에서 숙소를 찾은 후, 그는 8월 초에 지휘봉을 잡았다.


    1960년, 차마르틴 구단 입단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브라질 선수는 알미르 페르남부키뉴와 지우마르였다.  “그는 펠레 다음으로 완전한 선수였다. 그는 세련된 기술과 속도를 갖추고 있었다,"라고 주앙 살다나 감독은 알미르에 대해 설명한 바가 있다. Revista do Esporte에 의하면, 이 선수는 바스두 다 가마와의 계약이 끝나고 있었지만 재계약에 합의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여러 제안을 받았지만 결국 고국에 남아 코린치안스에 입단했다. 몇 년 후, 그는 보카 주니어스와 이탈리아의 피오렌티나, 제노아에서도 뛰었다. 골키퍼 지우마르는 1958 스웨덴 월드컵에서 브라질의 1순위 골키퍼로 선발되었다. 브라질의 Revista do Esporte는 이 골키퍼가 레알 마드리드로부터 최종 제안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며 첫 번째 뉴스를 보도했다. 레알 마드리드는 29세라는 그의 나이 때문에 망설이고 있었다. 이윽고, 스페인 언론은 이 소식을 반향하며 레알 마드리드가 선수단에 훌륭한 골키퍼를 보유하고 있고 비센테 "엘 그라파스" 영입에 근접했기 때문에 지우마르를 영입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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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2 칠레 월드컵은 아마릴도라는 새로운 브라질리언을 탄생시켰다. 빠른 스피드와 득점 본능, 왼발 슛이 돋보였던 이 브라질 공격수는 펠레가 부상을 당하면서 큰 기회를 잡았다. 그는 펠레를 성공적으로 대체했고 결승전에서 한 골을 포함해 총 세 골을 넣으며 대회 최고의 선수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의 활약은 타 대륙에서도 주목받았고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도 그의 상황을 문의한 이들 중 한 명이었다. Diario de Burgos는 이 공격수가 이탈리아로부터 매력적인 제안을 받았지만 스페인에서 뛰고 싶어 하며 마드리드의 제안을 기다리고 있다고 8월에 보도했다. 결국 그는 수백만 달러의 계약을 맺고 AC 밀란에 입단하게 되었다.


    한편, 펠레 케이스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큰 꿈이자 열망이었기 때문에 여러 시즌 동안 지속되었다. 연대순으로 보면 스웨덴 월드컵이 끝난 후 브라질 언론에서는 1959년 5월 Jornal do Dia의 "펠레, 디 스테파노의 대체자" 또는 Revista do Esporte의 "펠레는 레알 마드리드의 레이더망에 있다,"와 같은 헤드라인을 이미 읽을 수 있었고 1960년에 이 스타가 흰 셔츠를 입을 것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산투스가 펠레의 영입을 위해 요구한 금액은 64만 달러(약 4천만 페세타)라는 엄청난 액수였다. 1년 후인 봄, <Diario da Noite>는 메렝게스가 산토스에게 제시한 금액이 10만 달러(600만 페세타가 조금 넘는 금액)에 달할 것이며, 이 금액은 펠레가 마드리드 구단 역사상 가장 비싼 이적료가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스페인 신문 Imperio는 브라질 산투스로부터 당연히 부정적인 답변을 전달받았다고 보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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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1년 여름, 막대한 재정적 자원을 보유했던 인터 밀란은 남미의 스타 펠레에게 큰 관심을 보인 또 다른 팀이기도 했다. 또한, 그 해가 끝나기 전에 마드리드의 기술 비서인 에밀 외스터라이허는 "펠레가 쥘리메 컵(62년 칠레) 이후 마드리디스타가 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헨토가 외국으로 떠나면, 많은 돈을 벌어들일 수 있다는 점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62년이 되자, 베르나베우는 산투스에서 호화로운 재계약을 한 펠레를 포기해야 했고, 그곳에서 그는 한 달에 백만 크루제이로를 받게 되었다. 로스 블랑코스 회장은 스페인 언론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펠레에 관한 꿈을 꾸는 것은 의미가 없다. 산투스는 그를 세계 어느 곳에서도 팔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펠레 같은 선수가 한 명 더 있어야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이는 거의 불가능하다. 펠레 같은 선수가 다시 등장하려면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1962년부터 1973년까지 스페인 축구에서 외국인 이적 시장은 폐쇄되었고, 이는 베르나베우의 목표가 중단되었음을 의미했지만, 재편 이후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1973년 여름, 레알 마드리드는 브라이트너와 아르헨티나의 오스카 마스를 영입했다. 1974 독일 월드컵은 마드리드가 선수 보강을 살펴보기 위한 이상적인 시나리오였고, 대회 기간 동안 언론에 언급된 두 명의 브라질리언은 자이르지뉴와 마리오 페레스 "마리뉴"였다. 하지만, Mediterráneo 신문은 베르나베우 회장이 말한 매우 분명한 발언을 보도했다: "전혀 사실이 아니다. 훌륭한 눈 요깃거리이긴 하지만 30세 선수에게 5천만~7천만 페세타를 지불하는 것은 너무 많은 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분명히 자이르지뉴를 언급하고 있었을 것이다.


    1975년부터, 특히 1976년에는 세 가지 다른 브라질 스타들의 이름이 등장했다. 처음에는 히벨리누, 그다음에는 에두, 마지막으로 젊은 지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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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발잡이 히벨리누에 관한 첫 번째 뉴스는 1975년 9월 브라질 언론, Jornal do Sports에서 "히벨리누는 강력한 레알의 금지된 열매"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다. 1976년 여름, 해당 신문은 밀랸 밀랴니치 마드리드 감독이 레알 마드리드가 히벨리누의 이적료로 150만 달러를 지불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음을 보도했다. 이 언사는 베르나베우와 아구스틴 도밍게스를 놀라게 했다. "현재로서는 아무것도 없다,"라고 베르나베우는 밝히기도 했다. 한 달 후, 플루미넨시 회장 프란시스코 호르타는 "(150만 달러)는 훨씬 적다,"라고 말했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선수를 스페인 수도로 보내는 것을 배제했다.


    에두는 뛰어난 왼발을 가진 민첩하고 기술적인 왼쪽 윙어로 16세 때 잉글랜드 월드컵에 소집되었고 4년 후 멕시코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74년 독일 월드컵에서도 자이르와의 경기에 출전해 활약했다. 이 공격수는 파우메이라스에서 뛰었고 스페인 언론은 밀랴니치가 브라질로 건너가 이 브라질리언과 2년 계약을 맺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기술진은 끝내 그의 영입을 배제하고 덴마크의 공격수 옌센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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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염 없는 어린 지쿠는 베르나베우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완성하고 싶었던 대형 영입이었다. 독일의 네처가 팀을 떠났고 팀을 위해 또 다른 스타를 영입하고 싶어 했던 것이다. 여름, 루이스 몰로니가 플라멩구와 지쿠 계약을 논의하기 위해 남미를 방문할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하지만 리우데자네이루 구단은 "하얀 펠레"에게 천문학적 액수를 요구했고 지쿠와의 계약 가능성은 사라졌다. 또한, el periódico Mediterráneo 신문에 따르면 플라멩구는 코파 안틀라티코가 끝난 후 월 6,000달러의 조건으로 등번호 10번 지쿠에게 재계약을 제안할 예정이었다고 한다. 지쿠의 아버지가 아들이 해외에서 뛰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소문도 끊이지 않았었다.


    https://www.lagalerna.com/santiago-bernabeu-fichajes-mercado-brasile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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