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사 유니버설] 바르사의 1994/95 시즌 되돌아보기: 크루이프의 드림 팀이 쇠퇴하기 시작하다. > 스포츠 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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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르사 유니버설] 바르사의 1994/95 시즌 되돌아보기: 크루이프의 드림 팀이 쇠퇴하기 시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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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심
    2024-05-17 22:00 53 0 0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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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029573.jpg [바르사 유니버설] 바르사의 1994/95 시즌 되돌아보기: 크루이프의 드림 팀이 쇠퇴하기 시작하다.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을 상대로 패한 이후, 블라우그라나는 예전과 같지 않았다. 더 이상 야망은 없었고 그룹은 분열되기 시작했으며, 크루이프와 누녜스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이는 팀의 결과에 명확하게 반영되었다. 요한의 쇠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바르사는 1994/95 시즌에 잊어버리고 싶은 시즌을 보냈다. 


    1992/93 시즌에 FC 바르셀로나가 CSKA 모스크바를 상대로 패배한 것은 드림 팀이 위대한 것들을 성취하도록 동기를 부여했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은 1993/94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AC 밀란에게 4-0으로 패배했다. 그날은 요한 크루이프 팀의 영혼들이 죽은 날이었다. 믿음이 없었다. 캄프 누는 어두운 폭풍우를 겪었고, 선수들은 자신감을 잃었으며, 언론과 호셉 루이스 누녜스 회장은 크루이즘이 더 이상 구단의 이상에 실현 가능한 방법이 아니라고 점차 더 확신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크루이프는 자신의 철학에 충실하고 확신했다. 좋지 않은 결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접근 방식을 계속 신뢰했다. 슬프게도, 그는 자신이 승리를 챙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선수단은 의욕이 없었고 요한은 그들에게 낙관주의를 심어줄 수 없었다. 게다가, 공격수 호마리우의 기강 해이와 이탈 역시 바르사의 타이틀 굶주림 회복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1000029574.webp.ren.jpg [바르사 유니버설] 바르사의 1994/95 시즌 되돌아보기: 크루이프의 드림 팀이 쇠퇴하기 시작하다.

                       크루이프, 최악의 기록


    이적

    방출

    1994/95 시즌 초반, 바르사는 영리한 이적 시장을 보냈다. 그들은 최고의 선수들 중 한 명인 미카엘 라우드루프를 레알 마드리드로 가게 했다. 하지만 이 덴마크인은 이미 말년이었고, 그 당시 그에게서 €9.6m을 받아낸 것은 큰돈이었다. 라우드루프는 카탈루냐 구단과 자신의 시간이 호마리우의 존재로 끝났다고 생각하면서, 구단을 떠났고 바르사는 그를 매각하기로 동의했다.

    또한, 베테랑 공격수 훌리오 살리나스도 좋은 가격에 떠났다. 안도니 수비사레타는 그해 여름에 떠난 또 다른 선수였다. AC 밀란과의 결승전에서 패한 후, 안도니는 부진한 경기력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패배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던 선수인 그는 발렌시아에 가기로 결정했다. 수비수 후안 카를로스 또한 수비사레타의 행보를 따라 발렌시아로 팔려나갔다.

    1000029575.webp.ren.jpg [바르사 유니버설] 바르사의 1994/95 시즌 되돌아보기: 크루이프의 드림 팀이 쇠퇴하기 시작하다.
    8년 간 블라우그라나의 골문을 지켜오던 수비사레타는 구단을 떠났다.


    그리고 구단을 떠난 또 다른 선수가 있었다. 호마리우. 1994 브라질 월드컵에서 우승한 후, 호마리우는 고국에서 축하 행사를 즐겼고 여름에 바르셀로나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 했다. 이 브라질리언은 바르사의 훈련에 매우 늦게 돌아왔다. 그렇게 팀원들과의 관계는 깨졌다. 다른 선수들이 일하는 동안, 훌륭한 브라질리언 호마리우는 브라질에서 친선 경기나 하고, 배부른 음식을 먹는 등 파티를 하고 있었다. 사실, 이 슈퍼스타는 바르셀로나에 집도 없었는데, 그는 호텔에서 살았고 도시와 문화에 전혀 적응하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나라에서 살기를 원했다.

    일정 계획보다 20일 늦게 바르셀로나로 돌아온 그였지만, 크루이프는 그리 걱정하지 않았다. 이 네덜란드 감독은 호마리우가 골을 넣기만 하면 파티에 나갈 수 있게 해주었다. 그랬지만, 그가 캄프 누에서 계속 있을 수 있던 이유이자 유일한 것인 골들, 바로 득점력이 사라졌다. 그로 인해 요한 크루이프는 그 어떤 선수도 필수적이지 않다는 자신의 이상에 충실하기로 결정하면서 1월에 호마리우의 이적을 강행하도록 허용했다. 이것이 호마리우가 바르셀로나에서의 짧지만 마법 같았던 시간을 끝내고 플루미넨시에서 뛰기 위해 브라질로 돌아온 과정이었다.

    영입


    바르사는 1994/95 시즌을 앞두고 3명의 주요 선수를 영입했다. 게오르게 하지는 라우드루프의 이상적인 대체자인 것 같았다. 이 루마니아인은 민첩하고 다재다능한 10번, 미드필더나 공격수로 뛸 수 있는 찬스 크리에이터였다. 하지만, 하지는 크루이프의 고정 선수가 아니라 부차적인 역할을 맡았다. 게오르게 하지에겐 기대가 컸지만, 그는 구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여기다, 아줄그라나스는 구단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것이라며 많은 가능성을 보여준 미드필더 사비에르 에스쿠르자를 영입했다. 하지만, 그는 도시와 팀에 적응하지 못했다. 마지막 영입은 아벨라르도 페르난데스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독으로서 그를 기억하겠지만, 그는 선수로서도 훌륭했다.

    1994/95 라 마시아 픽은 요한의 아들 조르디 크루이프에게 돌아갔다. 라 마시아에서 한 기간을 보낸 후, 그는 1군으로 승격했다. 조르디는 미드필더로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그를 공격수나 공격형 미드필더로 기용하면서, 조르디는 다재다능하기도 했다. 그 결과, 그는 라 리가 28경기에서 9골을 넣으며 아버지의 팀에서 주전 자리를 꿰찼다. 전설적인 크루이프와 마찬가지로 조르디는 특유의 민첩성과 공격적이며 전술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어 축구선수 초기에 도움을 많이 받았다.

    선발 XI


    수비사레타의 이탈이 비극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평생 바르셀로나에 있었던 충실한 카탈루냐인 카를레스 부스케츠에게 문을 열었다. 10년 이상의 기다림 끝에 27세의 나이에 오랫동안 바라던 기회를 얻은 그였다. 카를레스는 나쁘지 않았지만 구단의 전성기 속에 그의 기회는 많지 았았다. 그의 성은 부스케츠로, 현대인들에게는 익숙하게 들릴지 모른다. 아 물론, 세르히오말이다.

    그해 크루이프는 누녜스와 언론, 그리고 아벨라르도의 훌륭한 경기력에 영향을 받아 전술울 바꾸었다. 그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다이아몬드 모양의 3-4-3을 폐기하며 4-4-2로 향했고, 로날드 쿠만과 아벨라르도가 만든 센터백 듀오와 함께 4-3-3으로도 변신할 수 있었다.

    1000029576.webp.ren.jpg [바르사 유니버설] 바르사의 1994/95 시즌 되돌아보기: 크루이프의 드림 팀이 쇠퇴하기 시작하다.
    크루이프는 평소의 3–4–3을 4–4–2 또는 4–3–3으로 변경했다.


    알베르트 페레르와 세르지 바르주안은 풀백으로 선발 출전했다. 그들은 이 전술의 혜택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큰 걱정 없이 공격할 수 있는 더 많은 자유를 가졌기 때문이다. 필드 중앙에는 펩 과르디올라가 피보테로 남았고, 중원의 측면에는 치키 베히리스타인과 기예르모 아모르가 자리했다. 크루이프는 선수단의 뎁스를 이용하여 베히리스타인, 아모르, 이반 이글레시아스, 그리고 에우세비오 사크리스탄을 실험했다. 네 선수를 번갈아 가면서, 그들은 모두 비슷한 특징을 가지고 있었지만 어느 속성에서도 크게 두각을 나타내는 이는 없었다.

    아모르는 크루이프가 더 많은 소유를 원할 때 사용되었고, 이글레시아스는 공간을 만들며 윙어로써 더 나은 플레이를 했다. 마름모 꼭대기에서는 호세 마리 바케로가 공격적인 게임을 구축하고 박스 안으로 도달했다. 그는 하지와 함께 번갈아가면서 로테이션되었다. 공격수로서,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는 세컨드 스트라이커가 되기 위해 자연스러운 윙어 역할을 그만두었다. 그렇지만 윙어 포지션에서 뛴 경기도 몇몇 있었다. 흐리스토 옆에는 조르디 크루이프가 있었다. 그는 호마리우의 부진 속에서 더 많은 출전 시간을 받았다. 그 브라질인리언은 이견의 여지가 없는 선발 선수였지만, 그의 구설수가 어린 조르디를 선발로 내세우게 했던 것이다.

    통계 및 대회 성적

    드레싱 룸의 낮은 텐션, 호마리우의 이탈, 언론의 압박, 누녜스-크루이프 관계, 그리고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적은 믿음은 1994/95 시즌을 크루이프 시대의 바르사 중 역대 최악은 아니더라도 최악 중 하나로 만들었다. 그 예로, 4년 연속 리그에서 우승을 거머쥐었던 팀은 라 리가에서 4위를 차지했다.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 열린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 및 키케 세티엔의 라싱 드 산탄데르와의 경기 등 굴욕적인 패배들이 있었다.

    마찬가지로, 코파 델 레이에서도 아줄그라나스는 아틀레티코 데 마드리드에 의해 조기에 탈락했다. 그리고 끝내 예상대로, 바르셀로나는 8강에서 챔피언스리그를 탈락했고, 이것은 카탈루냐 구단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1000029577.webp.ren.jpg [바르사 유니버설] 바르사의 1994/95 시즌 되돌아보기: 크루이프의 드림 팀이 쇠퇴하기 시작하다.

    그렇더라도 참담한 시즌이 끝나갈 무렵 크루이프는 여전히 신뢰를 받았다. 팬들은 요한을 사랑했지만 언론과 누녜스 회장은 그러지 않았다. 그들은 이 모든 실패가 크루이프의 잘못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요한이 떠나거나 해고될 것을 모두가 예상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결국 크루이프는 그곳에 1년 더 머물렀다.

    하지만 선수들은 자신들을 영광으로 이끈 전술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1995년 여름, 쿠만, 스토이치코프, 베히리스타인, 에우세비오는 구단을 떠났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극적인 상황의 중요성과 격려의 부족으로 인해 크루이프는 감독으로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그의 이상향에 실망한 듯 보였다. 

    https://barcauniversal.com/barca-1994-95-season-the-start-of-the-dream-teams-decli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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