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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르트1] 바이에른의 큰 실수, 위르겐 클린스만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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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심
    2024-04-27 19:35 51 0 0 0

    본문

    w940_h528_x470_y264_973989f1b3e0612b.jpg [스포르트1] 바이에른의 큰 실수, 위르겐 클린스만 시절



    처음부터 위험하다고 여겨진 감독 선임이었다. 


    FC 바이에른의 보스들은 한때 위르겐 클린스만을 공격했던 적이 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불과 몇 년 전에 클럽이 얼마나 그의 편이었는지 생각해보면 말이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클린스만은 독일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근무하면서 바이에른과의 갈등으로 인해 망가졌다. 이는 FCB의 아이콘 올리버 칸이 옌스 레만 뒤를 이어 골키퍼 2위로 강등된 일 때문만이 아니다.


    당시 울리 회네스는 "그는 캘리포니아에서 항상 춤추지 말고 여기 독일에 와서 여기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독일과 제2의 고향 미국 사이를 오가는 독일 월드컵 수장에 ​​대한 좌절감을 공개적으로 불평한 적이 있었다.


    클린스만은 실제로 뮌헨으로 왔다. 바이에른의 보스들은 클린스만이 대표팀에서 처럼 오트마르 히츠펠트의 후임자로서 바이에른에게 유사한 변화와 개혁을 수행하는 임무를 자신의 오랜 적에게 맡겼다.



    그러나 15년 전 오늘, 그것은 실패와 클린스만의 해임으로 끝났다.



    클린스만과 바이에른의 큰 미스매치



    이렇게 끝날 수 있다는 것은 일찍부터 명백했다. "모든 선수를 매일 조금씩 더 발전시키겠다"는 클린스만의 악명 높은 약속은 곧 처음에는 불만과 짜증을 불러일으켰다.


    1200x675.jpg [스포르트1] 바이에른의 큰 실수, 위르겐 클린스만 시절

    바이에른 훈련장에 있던 이 불상은 당시 위르겐 클린스만에 대한 조롱거리가 되었다.



    당시에 클린스만이 10명의 구성된 보조 트레이너들과 함께 진행했다는 사실과 지붕에 세워진 불상을 바라보며 훈련이 시작되었다는 것도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클린스만은 수년 후 그것이 전혀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해명했다)


    DFB 시절과 마찬가지로 클린스만의 때때로 기발한 아이디어와 자신감 넘치는 발표는 즐거움과 불만이 혼합된 반응이 나왔다. 그러나 논쟁이 사그러질 만큼의 스포츠적 성공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실현되지 못했다.



    랑닉의 호펜하임, 바이에른을 짜증나게 하다


    100일 후 클린스만의 첫 평가는 진지했다. 바이에른은 베르더 브레멘을 상대로 홈에서 2:5로 패한 것을 포함해 클린스만의 지휘 아래 31년 만에 최악의 시즌 출발을 기록했다. 그 사이에 0:5 패배도 있었다.


    대신 시즌 전반기 떠오른 팀은 새로 승격된 1899 호펜하임으로, 랄프 랑닉이라는 젊은 감독이 이끄는 젊은 선수들로 가득 차 있으며, 전반기 1위를 차지했었다.


    반면 뮌헨에서는 클린스만의 업무와 인사 결정에 대한 논쟁이 나왔다. 무엇보다도 그가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여름 동화의 영웅 루카스 포돌스키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당시 포돌스키는 미로슬라프 클로제, 루카 토니, 미국에서 임대 영입한 랜던 도노반의 뒤를 잇는 4옵션 스트라이커에 불과했고, 겨울에 고향인 쾰른으로 도피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2월 초 칼 하인츠 루메니게는 여름 이후 클린스만의 미래가 불확실하다는 신호를 보냈다. 3월 초 레버쿠젠에게 포칼을 탈락하고 클린스만과 팀 사이의 전술적 분쟁 소식이 유출되면서 그의 입지는 더욱 약화됐다. 그리고 한 달 후 붕괴가 시작되었다.




    마가트와 과르디올라에게 굴욕을 당하다


    4월 4일, 바이에른은 VfL 볼프스부르크와의 1위 결정전에서 1:5로 패했다. 굴욕의 하이라이트 : 그라피트의 백힐 골과 볼프스의 펠릭스 마가트 감독이 백업 골키퍼인 안드레 렌츠를 냉소적으로 교체 투입한 것 - 나중에는 3년 전 바이에른에서 해임된 것에 대한 복수



    챔피언스 리그에서 클린스만의 참패는 펩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끄는 FC 바르셀로나에게 4-0으로 패하면서 더욱 증폭되었다. 리오넬 메시 와 Co.는 전반전 만에 4골을 넣었고 데미첼리스, 브레누, 오도 및 렐로 이루어진 불쌍한 바이에른 수비진은 피들 스틱 마냥 춤을 추었다. 클린스만이 늘 기용했던 칸의 후임 미카엘 렌징 대신 잠시 선택한 베테랑 골키퍼 외르그 부트는 흠이 없지만 혼자서는 무력했다.


    2009년 4월 25일, 샬케 04를 상대로 0-1로 패한 경기에서 프랑크 리베리는 경고 누적으로 퇴장 당하며 리그 타이틀뿐 아니라 챔피언스 리그 진출권도 놓칠 위험이 커졌다. 루메니게, 회네스 및 당시 재무 이사 칼 호프너는 클린스만을 해임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전설적인 유프 하이인케는 도움을 요청했다.



    클린스만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클린스만은 자신의 해임에 "매우 실망"했지만 여전히 자신이 가치 있는 일을 했다고 확신하고 있다 ("우리는 미래를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 라고 말함).


    바이에른이 주로 내부 저항으로 인해 실패했다는 그의 확신은 몇 주 후 다음 폭발로 이어졌다.


    방송에 출연한 클린스만은 "알파티어(Alphatiere)"가 그의 삶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 "나는 여기저기서 나의 사고방식의 한계에 도달했다. 왜냐하면 나는 종종 발전하기를 원하지 않고 소유에 더 집착하는 사람들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 매우 화가 난 울리 회네스가 방송에 출연해 모든 것을 쏟아 부었다.



    회네스의 폭발



    “그가 침묵을 지켰다면 그는 그냥 철학자로 남았을 것이다. 클린스만은 FC 바이에른 역사상 가장 강력한 감독이었다” 며 “그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 이상이었다”고 불평했다. "그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리고 어쨌든 : "겨울 이적 시장 동안 새로운 영입을 제안한 그의 유일한 제안은 랜던 도노반이었다. 헤르만 게를란트는 더 이상 두 번째 팀에서 활동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한때 분노에 찬 회네스의 분노의 발언은 클린스만을 둘러싼 초기의 과대 평가를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비교한 스턴(Stern) TV 진행자 귄터 야우흐(Günther Jauch)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위르겐 클린스만이 오바마라면 나는 테레사 수녀다!"


    바이에른은 클린스만의 후임자로 루이 판 할을 데려왔고, 클린스만 이후에는 또 다른 "축구 교사"가 필요하다는 점을 반복적으로 강조했다. 네덜란드인은 실제로 더 성공적인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물론 반드시 더 조용하지는 않았지만.



    https://www.sport1.de/news/fussball/bundesliga/2024/04/fc-bayern-das-bittere-ende-eines-legendaren-fiask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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