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 애슬레틱] 소보슬러이 인터뷰: 물병과 골프공이 만들어낸 리버풀의 스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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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크 소보슬러이 인터뷰
물병과 골프공이 만들어낸 리버풀의 스타
도미니크 소보슬러이는 어린 시절 그때로 돌아간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안필드로 오기까지 소보슬러이의 여정을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시작점은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차로 45분 거리에 있는 도시, 세케슈페헤르바르 (Székesfehérvár)였다. 지난 달, 60m파운드의 이적료를 기록하며 리버풀 역대 네 번째 비싼 영입생이 된 소보슬러이의 놀라운 성장 뒤에는 아버지의 역할이 컸는데, 선수의 아버지 졸트는 그곳에 위치한 자택에서 아들에게 일종의 도전 과제들을 자주 던져줬었다.
당시 아버지가 내준 과제에는, 방에 물병들을 세워놓은 채 공을 몰고 그 사이공간을 지그재그로 통과하는 훈련도 있었다. 만약 도중에 물병을 하나라도 쓰러뜨리면, 소보슬러이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했었다.
"마당이 없어서, 집안에서 그랬었죠." 소보슬러이가 한 말이다. "물병 안에 물이 좀 차있으면, 그걸 피해 드리블하는 것도 더 쉬웠어요. 그런데 물이 아예 없으면, 난이도가 확 올라갔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거의 매번 물병에서 물을 비워내셨고요."
"하다가 물병이 하나라도 쓰러지면, 모든 물병이 쓰러지지 않을 때까지 계속 그걸 반복해야 했어요. 완벽하게 끝낼 때까진 거기에 죽치고 있어야 했고, 다 끝내면 그제서야 그곳을 빠져나올 수 있었죠."
"걸음바를 뗄 때부터 전 공을 차기 시작했었습니다. 아버지랑 처음 축구장 잔디를 밟아본 것도, 세 살 정도 때 였던 것 같고요."
본격적으로 코치로서 커리어를 쌓기 전, 헝가리 1부 리그에서 선수 생활을 하기도 했었던 선수의 아버지, 졸트는 2007년 경 본인의 고향 외곽 지역에 푀닉스 골드 (Főnix Gold FC)라는 유소년 아카데미를 공동으로 설립했었다. 그리고 바로 이곳에서, 소보슬러이는 6살 때부터 본인의 재능을 키워나갔다.
푀닉스 골드에서 기술적 역량을 강화시키는데 많은 공을 들였던 소보슬러이는 양손에 골프공을 쥔 채 훈련을 할 때도 있었는데, 이는 공의 소유권을 깔끔하게 되찾아오는 방법을 배우기 위함이었다.
"누가 저를 제치고 가면, 그 선수 셔츠를 잡으려고 하게 되잖아요. 그런데 저희 아버지는 상대한테 파울을 헌납하는 것 때문에 그걸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소보슬러이의 설명이다. "그래서 아버지는 제가 그런 습관 없이 성장하길 원하셨죠. 뭐, 사실 그때 아버지는 저 말고 다른 선수들한테도 다 손에 골프공을 쥐게 하셨어요. 손에 골프공을 쥐고 있으면, 다른 선수를 잡을 수가 없었으니까요. 아버지는 이런 괴상한 훈련들을 많이 하시곤 하셨는데, 이걸 전부 다 말하고 싶진 않네요!"
선수 아버지의 이러한 방법론이 괴짜같아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는 아들이 축구 선수로서 첫 발을 내딛는 것을 돕기 위해 아버지가 선택한 방법이었다.
그러던 중, 푀닉스 골드가 FC 바젤, 바이에른 뮌헨 같은 팀들이 참여하는 유명 유소년 토너먼트*에서 우승을 차지한 일이 있었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스카우트들이 소보슬러이의 플레이를 직접 보기 위해 경기장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대표팀 레벨에서도 실력을 인정받아 헝가리 U15팀 부터 연령별 대표팀에 줄곧 발탁되어왔고, 지금에 와서는 성인 대표팀에서 32경기에 출전한 소보슬러이다.
*기타 매체에 따르면, 코디얼 컵 (Cordial Cup). 오스트리아에서 진행되는 10-15세 유소년 토너먼트로, 1998년 첫 개최 후 매년 개최 중.
어찌됐든 결국 16살의 소보슬러이를 데려간 구단은 레드불 잘츠부르크로, 입단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마친 선수는 구단 아카데미 팀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전 항상 축구 선수가 되고 싶었습니다." 소보슬러이의 말이다. "물론 정말 힘들었던 순간들도 있었어요. 파티에 가거나 본인만의 삶을 즐기는 친구들을 볼 때,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훈련장으로 가야할 때가 그랬죠."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었어요, '내가 왜 이 짓거리를 하고 있는거지? 나도 좀 즐기면서 내 삶을 살고 싶은데'. 하지만 그럴 때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시곤 하셨어요, '아니야, 나중에 즐기면 되잖아'. 결국에는 아버지 말씀이 옳았습니다."
"아버지는 제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세요. 저랑 아버지는 모든 걸 함께 했거든요. 어릴 때, 사람들의 한 90퍼센트 정도는 어머니 품에서 크잖아요. 저 같은 경우에는, 아버지가 곁에 있었습니다."
"하루 일과 중에, 어머니랑 대면하는 경우는 아침에 식사를 챙겨주셨을 때랑 저녁에 훈련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 두 경우 밖에 없었어요.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면 전 잠자리에 들었고요."
그렇게 오스트리아라는 무대에서, 다이내믹한 미드필더인 소보슬러이는 빠르게 성장했다. 잘츠부르크의 하위 구단인 FC 리퍼링에서 프로 커리어 첫 발을 내딛고서, 17살이 되던 해에 잘츠부르크 1군 데뷔전을 치렀을 정도다.
한편, 소보슬러이는 10대 시절 스티븐 제라드의 명언을 몸에 타투로 새겼었는데, 이는 지난 달 리버풀 이적이 확정되고 선수가 구단의 아이콘이 입었던 8번 셔츠의 후임자가 되었을 때 대중들로 하여금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사실이다.
하지만 어릴 때부터 익숙하게 접해온 경쟁의 논리에 따라, 소보슬러이는 한 가지 내기에서 이겨야만 아버지로부터 타투를 몸에 새겨도 된다는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헝가리어로 새겨서 정확하게 번역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뜻이에요. '신이 네게 재능을 주셨어도, 엄청난 노력과 희생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이는 아무 쓸모가 없다'." 소보슬러이는 왼쪽 팔뚝에 새겨진 타투를 가리키며 말했다.
"메시지가 마음에 들었어요. 아버지도 몸에 타투가 몇 개 있어서, 저도 항상 타투를 새기고 싶었고요. 타투를 새기고 싶다고 말하니까,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그래, 그럼 타투로 새기고 싶은 문장을 일단 한 번 찾아봐'. 그래서 전 말씀드렸죠, '벌써 하나 찾아뒀어요, 그러니까 무슨 내기를 하면 좋을지 얘기해보자고요!'"
하지만 상대가 아버지 졸트였기에, 내기의 난이도는 만만치 않았다.
"잘츠부르크 시절에 구단 차원에서 달리기 테스트 같은 걸 보곤 했었는데, 거기 아카데미에 누군가 세웠었던 최고 기록이 하나 있더라고요." 소보슬러이는 말을 이어나갔다. "아버지가 그걸 떠올리시더니, 말씀하셨죠. '네가 1군에 들어가려면, 그 기록을 깨야된다. 만약 그거를 깨면 타투 새기는 것도 허락해주마'. 그래서 결국 전 그 기록을 깼고, 타투를 새길 수 있었습니다."
"우상은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였지만, 리버풀이나 다른 팀들 경기도 보곤 했었어요. 제라드는 제 어린 시절 최고의 선수들 중 한 명이었고요."
"그런 선수의 등번호 8번을 지금 제가 달게 되었는데, 많이 기쁘고 자부심을 느낍니다. 하지만 전 저만의 길을 걸어가고 싶어요."
잘츠부르크에서 83경기에 출전해 26득점, 34도움을 기록한 소보슬러이는 3시즌 연속 리그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후 2020년 12월, 선수의 다음 행선지는 RB 라이프치히가 되었다.
분데스리가에 입성하게 되면서 소보슬러이는 본인보다 12개월 일찍 도르트문트에 입단했던 엘링 홀란이 걸어간 길을 뒤따르게 되었는데, 소보슬러이와 홀란, 두 선수는 잘츠부르크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탄탄한 우정을 쌓은 사이다.
그리고 그런 두 선수가 이제는 프리미어리그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다. 실제로 홀란은 소보슬러이에게 리버풀 이적을 축하해줄 뿐 아니라, 선수가 체셔 주 (Cheshire)에 집을 구할 때도 조언을 건네줬다고 한다.
"엘링과 전 지금도 친해요. 서로 메시지도 주고 받고 있고, 시간이 나면 대화도 합니다." 소보슬러이의 말이다. "사는 곳도 근처라, 앞으로 저녁식사도 같이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리버풀에 입단하기 전에 엘링이 '준비 잘하라'고 그러더라고요. 근데 걔도 알거에요, 제가 이미 준비되어있다는 걸 말이에요. 프리미어리그가 엄청난 리그고, 제가 완전 좋아할 거라고도 말해주더라고요."
"엘링이 맨시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인 것에 대해서는 전혀 놀라지 않았어요. 어떤 활약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인지, 그 친구가 얼마나 열심히 노력해왔는지를 전 알고 있었거든요. 엘링은 정말 대단한 선수에요."
"리버풀과 맨체스터 연고 구단들 사이에 존재하는 라이벌리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만, 전 준비되어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리버풀에 온 거고요. 그런 경기에서 뛰면 어떤 기분이 들지, 느껴보고 싶네요."
득점포를 가동하며 팀의 2-0 승리에 일조한, 프랑크푸르트와의 DFB 포칼 결승전을 끝으로 소보슬러이는 라이프치히와 멋드러진 작별을 고했다. 2년 반이라는 시간동안 라이프치히에서 소보슬러이가 남긴 기록은 91경기 출전, 20득점 22도움이다.
한편 소보슬러이는 올 여름 휴가 기간 동안 에이전트인 마차시 에슈테르하지에게 타 구단이 본인에게 관심을 보인다면 이를 처리해달라고 요청했었다. 그리고 6월 말, 릴리즈 조항의 만기일이 빠르게 다가오자 리버풀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이후, 이적은 빠르게 성사되어 소보슬러이는 역대 헝가리 축구 선수 최고 이적료를 갈아치울 수 있었다.
"제 에이전트는 막후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을 제게 말해주지는 않습니다. 본인이 확신이 섰을 때, 그리고 우리가 이적을 위한 준비가 되었을 때만 말을 해주죠." 소보슬러이의 말이다. "모든 게 3일 만에 다 진행됐어요. 에이전트가 제게 연락을 해오더니, '리버풀이 진지하게 관심이 있다니까, 한 번 이야기를 해보자'더군요. 그래서 그 다음 날, 이적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고, 셋째 날 리버풀 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크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어요. 제 삶에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 몇몇에게 연락을 해서 의견을 물어봤고, 저랑 한솥밥을 먹었던 선수들 중 저보다 경험이 많은 선수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저는 제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 명확한 생각이 있었는데, 리버풀한테서 구단의 계획을 설명받고는 이렇게 대답했었죠. '그럼 한 번 해보자고요'."
선수에게 리버풀이 올 시즌 챔피언스리그에 출전하지 못한다는 사실보다 중요했던 것은 구단의 규모와 위르겐 클롭이라는 감독의 존재, 그리고 2019년 10월 잘츠부르크 소속일 때 경험했던 아름다웠던 안필드에 대한 기억이었다.
"잘츠부르크 소속으로 안필드에서 뛰었을 때, 팬들의 에너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소보슬러이가 한 말이다. "경기는 4-3으로 졌었지만, 안필드 잔디 위에 올라섰을 때 전 그저 주위를 둘러보면서 이런 생각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내가 지금 어디 있는거지?!'. 분위기가 정말 끝내줬었는데, 이젠 제가 그곳에서 뛴다니 기분이 더 좋을 것 같네요."
"감독님은 감정이 풍부하신 분이셔요. 감독님은 하고 계시는 일에 본인의 모든 걸 쏟아부으시는데, 선수들도 그러기를 원하시죠. 선수들 모두가 그렇게 한다면, 우린 최고의 위치에 오를 수 있을 거고요."
"당연히 모든 축구 선수들은 챔피언스리그에서 뛰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리버풀이 저를 영입하고 싶어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부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어요. 이제부터 그걸 향해 달려가는거지, 이적할 때 챔피언스리그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마땅히 있어야 할 그 무대로 돌아갈 수 있도록 팀을 돕는 것이 지금 제가 원하는 전부입니다."
본인의 생각을 분명하게 표현할 줄 알고, 자신감과 의욕이 충만한 소보슬러이를 보면, 어째서 선수가 22살의 나이에 팀 동료들의 투표로 헝가리 대표팀의 주장이 되었는지 그 이유를 쉬이 알 수 있다.
축구를 벗어나면, 소보슬러이는 여자친구인 펀니 게체크, 말티푸 (*말티즈와 푸들의 교배종) 종 강아지 마일로와 함께 시간을 보낸다. 여기에 플레이스테이션으로 콜 오브 듀티를 즐기기도 하는 소보슬러이는 아버지의 허락 하에 리버풀 입단을 기념하는 의미로 본인에게 새 차를 선물할 생각을 하고 있다.
"아참, 저랑 아버지는 지금도 계속 내기를 하고 있어요!" 소보슬러이가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저는 차를 좋아하는데,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요. '원하면 아무 차나 사도 되는데, 우선 무언가 성과를 거두고나서 사야된다'. 그래서 라이프치히에 입단했을 때 차를 하나 뽑았었습니다. 이제 리버풀에 입단했으니, 하나 더 뽑을 수 있게 됐고요. 그 사이 기간에는 다른 차를 사지 않았어요."
"어떤 차를 뽑을 지는 이미 정해놓았는데, 일단 지금은 비밀로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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