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1월, 레딩은 승격에 대한 열망으로 잔잔한 반향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챔피언쉽에서 6위를 차지하고 있었으나, 2011년 말 그들은 완전히 기세를 탄 상태였습니다. 그들의 감독 브라이언 맥더못은 그들이 플레이오프보다 더 높은 곳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축구디렉터 닉 하몬드에게 여기에 닻을 달아줄 빅 사이닝을 요청했습니다. - 이는 블랙번 로버스의 제이슨 로버츠였습니다.
신체적인 능력이 뛰어난 공격수 로버츠는 블랙번이 그를 뛰게 하지 않게 하면서 이적시장에 올라왔습니다. 그의 계약에는 일정 경기이상의 출전시 계약 연장 조항이 있었고 블랙번은 그 조항을 발동시키고 싶지 않았습니다.
레딩은 이 이적을 감행했고, 로버츠는 그후 6골을 넣어 6승을 이끌어내면서 맥더못의 팀이 우승할 수 있는데 공헌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이적에 앞서, 블랙번 로버스에서 로버츠의 논란은 상당히 복잡한 상황이었고 그에게 관심있었던 많은 팀들에게 잠재적으로 너무 많은 부담이 될 수 있었습니다.
디에슬레틱을 통해 맥더못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그것은 복잡했습니다."
"자세한 것에 대해 언급하진 않겠지만, 꽤나 어려운 일들이었습니다. 저는 제이슨이 우리를 위해 어떤 선수가 되어줄지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우리팀에 어떻게 녹아들지 볼 수 있었고 그가 우리팀의 변화를 만들어 줄 것임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딜이 빠르게 진행된다고 느끼진 않았습니다."
"저는 닉에게 전화했고, "이봐 친구, 난 이 선수가 필요해. 정말로 필요하다고"라고 말했습니다. 그전에는 하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에 대해 압력을 가했었습니다. 하지만 닉은 동요하지 않았죠. 그는 "OK"라고 말했고 가서 그걸 해결해왔습니다. 그 다음 무슨일이 있었는지는 다들 잘 알것입니다. 이 이야기는 닉이 왜 이 클럽에서 그렇게 좋은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들은 레딩에서 하몬드가 해온 다른 이야기도 갖고 있었습니다. 2006년 106점의 기록적인 승점으로 챔피언쉽을 우승했을때 그의 영향력과 같은 것입니다. : 그들이 데이브 킷슨, 쉐인 롱, 케빈 도일 그리고 맷 밀스와 같은 저렴한 계약을 가지고 엄청난 이익을 창출하기 전까지 선수단을 멋지게 향상시켰던 것들과 같은 것들입니다. 하지만 리즈 유나이티드가 9개월전 영입한 이 이적에 대한 자문의원이었던 하몬드에 대해서 그에 대해 반복되어 나오는 이야기는 그의 성격에 관한 것입니다.
맥더못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사실을 다루며 일을 합니다."
"그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분명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며 감정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저는 레딩에서 둘중에서 감정적임을 맡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과정중에 혼란스러워지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리즈가 지난 여름에 착수한 복잡한 재건 작업에 필요한 합리적이고 안전한 손이었습니다.
축구 디렉터 혹은 그에 상응하는 다른 직책명은 21세기 축구의 모든 분야에 존재합니다. 그들은 현재 매우 가치있는 자원이 되었으며, 뉴캐슬 유나이티드는 그들의 디렉터 댄 애쉬워스에 대한 보상으로 맨유가 20M파운드 (25.5M달러)를 지불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리버풀은 그들의 전 축구디렉터 마이클 에드워즈를 돌아오도록 설득하는것에 성공한다면 그들은 그가 원하는 정확한 직무 권한과 운영그룹에서의 작은 지분을 내어주어야 할 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축구계의 새로운 개척자들입니다. : 영입하는 사람들을 영입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몬드와 레딩은 시대를 앞서간이들입니다. 하몬드는 2002년 레딩의 역사상 최초의 축구 디렉터가 되었고 이것은 유럽 전역에서 이런 포지션에 대한 신뢰를 주기 시작하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직책이었습니다. 당시 35세의 하몬드는 마데스키 스타디움(역주: 레딩의 홈구장)에서 은퇴한 스윈든 타운 출신의 골키퍼였습니다.
레딩은 그를 골키퍼 코치로 취임시킨후 그에게 아카데미의 전권을 부여하였는데 이는 그가 10년이상 유지하게 될 더 중요한 역할인 축구디렉터의 부임을 앞둔 전조현상이었습니다. 이는 레딩이 최초로 프리미어리그에 승격함과 동시에 이루어 지게 되었습니다.
마데스키 스타디움의 일부 사람들에게는 그가 처음 축구 디렉터로 임명되는 결정은 조금 이상해 보였습니다. 잉글랜드의 다른 팀에서 일하면서 이 기사에서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던 한 전직 축구선수의 말에 따르면 "사람들은 그가 골키퍼 코치에서 축구 디렉터가 되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당시 축구 디렉터가 뭔지 이해하지 못했고 그게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몰랐습니다."
"우리는 그것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에 저희들에게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모두가 지금은 그것을 이해하기 시작했고 니키(역주: 닉 하몬드)가 그 직책을 수행하는 것을 보면 볼수록 그가 얼마나 그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를 볼 수 있었습니다."
지난 시즌 말 리즈에는 축구 디렉터가 없었습니다. 강등의 여파로 리즈는 팀의 운영을 결정지을 사람들을 모두 잃게 됩니다. 빅토르 오르타 전 축구 디렉터는 리즈가 프리미어리그 마지막 네경기의 감독으로 샘 앨러다이스를 임명하려는 절실한 움직임에 대해 반대한 뒤 5월 초 팀에서 사임하였습니다.
앨러다이스가 떠나면서, 그들은 감독이 없었으며, 그들의 많은 중요한 선수들이 엘런로드를 떠날 수 있는 쉬운 방법들이 적힌 계약 조항으로 인해 시달리게 됩니다. 복잡한 이적 시장을 관리하는데 있어서 잘 짜여진 직원들 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리즈가 강등된 뒤 며칠만에 리즈의 CEO 앵거스 킨네어는 닉 하몬드를 영입할 것을 제안합니다. 울버햄튼의 전 기술감독(Technical Director) 스콧 셀러스도 또다른 대안이었습니다. 6월 중순 하몬드는 관료주의와 적폐를 끊어내고 이적을 성사시킬 책임을 가지고 영입 자문의원(Recruitment Consultant)로 합류하게 됩니다. 그는 대중적으로 전혀 유명한 인사가 아니며 그러고자 하는 야심도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지금조차도 여전히 리즈팬들중에 그에대해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로 넘쳐납니다. 그는 2021년 말 뉴캐슬에서 컨설팅을 제공한 이후로 축구계에서 떠나있었습니다.
조용히 그리고 뒤에서, 하몬드는 리즈의 강등된 스쿼드의 혼란을 바로잡으며 챔피언쉽에서 승격을 향해 지난달 리즈의 역대 리그 연승기록이었던 10연승을 달성하며 2부리그에서의 리즈의 최고 승점기록을 바라보는 팀으로 바꿔냈습니다.
하몬드에 대한 인식은 그가 클럽의 성공에 대한 기록에서 그리 많은 것을 추구하진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만 리즈의 이번시즌 그의 공헌은 그리 많이 언급되지 못했습니다.
강등이 되면서 엘런로드의 이사회는 위기를 맞게 되고, 49ers 엔터프라이즈 운영진은 2주 뒤 전 회장인 안드레아 라드리자니로부터 팀을 인수하는 계약에 합의하게 됩니다. 49ers는 의도적으로 오르타의 판단에 이적을 맡기는 모델에서 위원회의 의사가 좀더 작용하는 영입 모델로 변화시켰습니다. 그들은 하몬드를 영입한뒤 기술감독으로 그레타르 스테인슨을 임명하게 됩니다. 스테인슨은 주로 재능을 찾는 임무에 초점을 두었으며, 그의 팀은 최근 애버딘으로부터 조단 마일스가 채용담당관으로 도착하면서 강화되게 됩니다.
킨네어는 CEO로서 자리에 남아 이적을 진행하는 또다른 담당으로 남게 되었으며 여름 이적시장에서 다양한 이적들이 이러한 다방면의 접근에 의존하여 진행되었습니다. 스테인슨은 스완지 시티가 조엘 피루를 팔게 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킨네어의 토튼햄 구단주 다니엘 레비와의 관계는 조 로든의 임대를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 소식통에 따르면 하몬드는 이번 시즌 리즈의 모든 경기에 출장중인 유일한 선수 에단 암파두를 첼시로부터 영입할 수 있도록 접근하는데 있어서 높은 영향력을 발휘하였다고 합니다. 암파두의 이적료 7M파운드는 49ers가 이적시장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발휘한 첫번째 사례로 우울해졌던 팬들에게 긍정을 주입해준 사례였습니다.
여러 방면에서 봤을때, 하몬드는 그의 선수생활에서 성장해왔습니다. 맥더못이 있던 시절 아스날에서 연습생으로 시작했던 이 골키퍼 지망생은 부상으로 인해 성장하지 못했으며 결국 은퇴를 강제당하게 됩니다. 스윈든에서 그는 불운을 피해보고자 13번 유니폼을 포기하였다고 하는데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여부는 논쟁의 여지가 있더라도 그가 1995년 플리머스를 떠나 1996년 레딩으로 오기까지 다리를 두번이나 부러졌다는 사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그의 커리어동안 그가 부상명단에 있으면서 그는 예상하지 못한 기회들을 부여받게 됩니다. 스윈든에서 그는 과거 인맥으로 인하여 아스날의 수석 스카우터 스티브 롤리로부터 아스날의 스카우터 역할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습니다. 롤리는 하몬드가 11살일때 그를 발견하였습니다. 이 일들은 계속해서 감시하에 이루어졌는데 스윈든 팀 동료들은 그것에 대해 거의 알아채지 못하였습니다.
하몬드는 레딩시절 토미 번스 감독하에서 세번째 순위 골키퍼로 활동하였는데 번스로부터 아스날을 다시 한번 도울 기회를 허가받게 됩니다. 그는 벵거의 조수 팻 라이스를 통해 아르센 벵거를 위한 상대팀 매치 리포트를 손수 작성하게 됩니다. 이런 여러 이상한 상황들이 지나가고 어느날, 하몬드는 번스의 사무실에 대화를 위해 불려가게 되며 하몬드는 그가 레딩의 선발 라인업에 복귀하는 것을 기대하고 찾아 갔습니다. 그러나 번스는 새로운 골키퍼를 영입하는데 있어서 하몬드의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몬드는 WBA의 리저브팀에서 뛰는 필 화이트헤드를 보러가고, 그의 추천으로 인해 1999년 화이트헤드가 레딩으로 이적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전 맨시티와 포츠머스의 미드필더인 피츠로이 심슨은 스윈든에서 하몬드와 함께 방을 썼으며 그에 대해 "우리가 처음 만난 날 이후 전혀 변하지 않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심슨은 디에슬레틱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닉은 No.1자리를 두고 우리 골키퍼(프레이져 디그비)와 엄청난 경쟁을 펼쳤습니다."
"그들은 항상 팀에서 엎치락 뒷치락 했지만, 닉은 그의 커리어 뒤를 계획하는 데 있어서 적극적이었다는 것을 그당시에도 알 수 있었습니다. 우리 대부분은 그렇지 않았죠. 그는 교육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당시에 그는 그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성숙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로 구성된 전세계의 네트워크를 갖고 있으며 개방적이고 오랜시간 그 업계에 대해 파악하고 있습니다. 친구로서나 비즈니스적으로나 우린 언제나 그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을 다시한번 강조해야 합니다. (그런 자질이 없다면) 닉이 일하는 수준으로 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앨런 파듀는 2000년 선수에서 은퇴한 뒤 레딩 시절 하몬드의 멘토 역할을 해준 여러 코치중 하나입니다. 당시 구단주였던 존 마데스키 경은 닉 하몬드를 충분히 존경하였기에 그에게 모든 것을 감독하고 레딩을 움직이는 풋볼 디렉터의 자리를 만들어주었습니다.
맥더못은 다음과 말했습니다.
"그는 항상 클럽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가 한 모든 일들, 레딩을 위해 했던 모든 거래는 "무엇이 레딩을 위해 최선인가?"로 귀결되었습니다. 그는 개인의 목표를 갖거나 개인으로 인한 부정적인 일들을 결코 만들지 않았습ㄴ디ㅏ."
맥더못은 2012년 마데스키로부터 레딩이 러시아 사업가 안톤 징가레비치로 넘어가게 되면서 2013년 감독으로 경질되었을때 이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날이 오게 될 줄 몰랐습니다."
"우린 4연패를 했고 뭔가 경영진의 방침이 있을거라고는 생각했지만 그들은 저에게 그들이 충분히 기회를 줬다는 암시를 주지 않았었습니다."
"저는 안톤 징가레비치를 만나기 위해 마데스키의 호텔로 갔고 도착했을때 닉이 제 어깨를 두드렸습니다. 그가 거기있을줄은 몰랐습니다. 그는 "안녕 브라이언"이라 말했고, 제가 해고당할 것임을 알게 해주는 암시를 보내주었습니다. 저는 미리 알고 당하는 것을 더 선호하는 만큼 그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밖으로 나가는 길에, 그는 제가 집에 갈 수 있는 차를 갖고 있느지 물어봤습니다. 클럽은 평소처럼 차를 한대 내어주었습니다. 저는 그에게 "차는 두고 버스를 타는게 더 쉬울 수 있을것 같다"라고 말하며 함께 계단에 서서 웃었습니다. 그는 저에게 오히려 잘해준 사람이었기 떄문에 어떠한 나쁜 말이나 불편한 말 없이 레딩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하몬드의 방식들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맥더못은 현재 스코틀랜드 히버니안의 축구디렉터입니다.
그가 2016년 마데스키 스타디움을 떠날때, 하몬드는 20년간 레딩과 함께 해왔습니다. 그가 떠난 일은 놀라운 일이었으며 그 후 WBA에서 비슷한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더욱 도전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특별한 실수도 없었고 주요한 성공도 없었습니다. 비록 그가 WBA의 영입에 대한 비판을 받았으나, 그곳에서의 결과물들은 그가 처음 연결되었던 감독 토니 퓰리스가 이적 정책을 엄격하게 통제하고 있었다고 전해집니다. 퓰리스 감독이 경질된 후 감독으로 파듀가 영입되게 되고 이것이 실패하면서 이또한 부정적인 뉴스를 만들어 냅니다. 파듀는 레딩시절 하몬드의 동료였고 결과론적으로 이러한 협력관계가 너무 길게 지속되었습니다.
다만 당시 WBA의 중국인 구단주들은 프리미어리그에서 경험이 있는 감독을 원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영입하는데 실패한 하몬드에게 파듀는 하몬드가 의지할 수 있는 몇안되는 선택지중 하나였습니다. WBA는 2018년 하몬드를 내부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해임하였고 그는 셀틱으로 이적한 뒤 뉴캐슬로 이적하며 뉴캐슬의 새로운 사우디 구단주가 투자를 하게된 첫번째 이적 시장 이전에 그를 자문의원으로 임명하였습니다. 뉴캐슬은 애쉬워스 이전 이러한 구조가 거의 없었습니다. 하몬드는 잠재적인 영입과 계약 제안에 대해 조언하며 이적 계획을 상세하게 검토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습니다. 브루노 기마랑이스를 비롯하여 당시 이적시장에서 영입한 선수들은 뉴캐슬이 강등에 대한 걱정을 잠재우는데 도움을 주었습니다.
리즈는 지난 6월 강등으로부터 잔재물들을 회복하는 동안 그들만의 이적 계획에 대해 간절하게 요구받았습니다. 엘런 로드의 그 누구도 영입에 있어서 현재 가장 큰 최종 결정을 주장하는 것이 다니엘 파르케임을 부정하지 않지만 하몬드는 파르케를 감독으로 가장 적합한 사람으로 결정한 감독직 인터뷰의 주요 책임자였고 그역시 선수들을 이적시키고 데리고 오는 데 있어서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었습니다.
파르케의 임명은 7월 4일까지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리즈는 챔피언쉽 시즌이 시작하기 18일 전인 7월 19일에 암파두가 영입되기 까지 아무도 영입하지 못했습니다. 이적시장이 끝나기 직전 그들은 루이스 시니스테라가 본머스로 임대가고 제이든 안소니가 반대로 오는 것을 성사시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습니다.
어찌됬건, 여러 파편들이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리즈는 챔피언쉽에서 가장 강력한 드레싱룸중 하나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현재 파르케의 리즈를 이끄는 추진력을 비추어 볼때, 리즈의 긍정적인 시즌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사실 지난 여름에는 이렇게 되지 않는 것을 예상하기가 좀더 쉬웠을 것입니다.
하몬드에게 이 기간은 고작 12개월을 조금 더 있게 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번 1월과 다가오는 여름이적시장을 대응하기 위한 계약을 연장하였으나, 리즈의 이사회는 여전히 외부의 축구디렉터를 영입하여 팀의 운영구조를 다시 확장하는 것을 강력하게 고려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하몬드는 떠날것이고 그는 물론 조용히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리즈가 승격한다면, 그는 리즈에게 감사의 빚을 남기고 가게 될 것입니다.
그의 전 동료중 하나가 말했듯이 하몬드의 직접적인 스타일은 협상에서 그에게 유리하게 작용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욕보이지 않기때문에 욕보지도 않는 사람입니다."
"그는 축구계에서 존경을 받아왔고 그것이 그에게 그 일들을 가능하게 해줍니다."
그는 노출을 즐기지 않는 편입니다. 그리고 맥더못은 2012년 레딩이 승격해서 자축행사를 할때도 여전히 버스 뒷자석에서 조용히 남고자 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맥더못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는 버스나 뭐 그런걸 타고자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제가 부탁했습니다."
"그는 감사인사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건 그의 스타일이 아니죠"
그렇다면 성취의 감격이 아닌 무엇이 그의 원동력이 되었을까요?
"당신이 그것을 물어봐주세요"
"저도 모릅니다. 그저 그는 순전히 그가 일하는 클럽을 위해 최선의 일을 다하는 것을 목표로 할 뿐입니다. 그게 전부에요"
이것이 바로 지난 여름 리즈가 프리미어리그에서의 위상을 불태워버리던 시절, 그토록 바라던 정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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